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문단 편집) === [[마우리키우스]](582~602) === 카파도키아 아라비수스 태생의 군인으로, 동방 전선에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여 승진을 거듭하다 577년 동방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했다. 582년 티베리우스 2세의 딸 [[콘스탄티나]]와 결혼하였고, 그해 8월 14일 차기 황제로 지명을 받아 43세의 나이에 황위를 계승했다. 당시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더미였다. 거듭된 전쟁과 티베리우스 2세의 사치로 인해 재정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고, 이탈리아 전선은 여전히 위태로웠으며, 사산 왕조는 끈질기게 침략했다. 여기에 발칸 반도에서도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이 밀고 내려와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이 많은 문제들을 착실하게 해결했다. 먼저, 584년에 [[라벤나 총독부]]를 창설하고 뒤이어 [[아프리카 총독부]]를 세웠다. 이 두 총독부의 총독들은 군사 뿐만 아니라 내정 관리까지 도맡으면서, 자발적으로 해당 지역을 다스릴 권한이 부여되었다. 다만 황제에게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보내야 했고, 황제가 파견한 관리들의 조사를 성실히 받아야 했다. 총독들은 막강한 권한을 활용하여 [[랑고바르드족]]과 [[베르베르인]] 등 외적의 침략에 자발적으로 대처했고, 그 결과 혼란스럽기 짝이 없던 서방 전선이 안정화되었다. 588년, 사산 왕조에서 대규모 내란이 일어났고, [[호스로 2세]]가 [[바흐람 추빈]]에게 축출된 뒤 마우리키우스에게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간청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이를 호기로 보고, 호스로 2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결과 호스로 2세는 591년 크테시폰을 탈환하고 바흐람 추빈을 몰아냈다. 이후 사산 왕조는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를 동로마 제국에 넘겼고, 그동안 정기적으로 지급받던 공물을 더 이상 받지 않기로 했다. 이리하여 동방 전선은 동로마 제국에 매우 유리한 환경으로 안정되었다. 서방과 동방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한 뒤, 마우리키우스는 발칸 반도에서 날뛰는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을 향해 대대적으로 반격했다. 591년부터 반격을 개시한 마우리키우스는 592년에 시르미움을 회복하였고 593년에는 아바르 - 슬라브 - 게피데 연합군을 격파한 후 다뉴브 강을 도하하여 북진하였다. 599년까지 다뉴브 강 이남의 야만인들은 일소되었고, 602년에 왈라키아에서 슬라브족을 섬멸했다. 한편, 마우리키우스는 긴축 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주요 행사에 더 이상 돈을 투자하지 않았고 시민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는 걸 중단했다. 또한 국고가 탕진될 지경에 이르자 지출을 줄이기 위해 군 감축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잡음이 일어났다. 588년에 모든 군량의 4분의 1을 감축해 동방군이 폭동을 일으키게 만들었고 599년에는 아바르족이 잡아간 제국군 포로 1만 2천 명의 몸값을 지불하는 것을 거부해 포로들이 모조리 학살당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이에 시민과 군은 반감을 품었고, 602년 [[포카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사산 왕조로 망명하려 했다가 도중에 체포되었고, 602년 11월 27일 다섯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유스티니아누스 왕조는 무너졌고, 포카스가 집권했다. 그러나 포카스는 폭정을 일삼으며 동로마 제국이 사산 왕조와 아바르, 슬라브족의 침략으로 쇠락하게 만들었고, 610년 10월 [[이라클리오스]]가 포카스를 처단하고 [[이라클리오스 왕조]]를 창건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